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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n Bream, Guitar

2016.11.01 08:41

오작교 조회 수: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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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n Bream. 1933. 7. 5. England 출생

  

  줄리언 브림(이하 브림)은 런던태생의 기타리스트로 기타와 류트의 양면에 걸쳐 대가의 솜씨를 보여준다. 어려서는 그의 아마추어 재즈기타리스트 인 아버지에게 배웠고 11세 때부터 러시아 기타리스트였던 알렉시스 체스나코프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12세에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연주무대에 참가할 정도로 기량이 향상되었다. 그 뒤 그는 기타리스트 협회장인 페롯에게 러시아식 겸 이탈리아식 기타 연주법을 사사받게 된다.

 

1947년 세고비아는 런던 공연을 위해 영국에 와 있었고, 브림은 페롯의 소개로 세고비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세고비아는 그의 연주를 듣고 즉석에서 그에게 적극적인 후원을 할 것을 약속하였고, 브림에게 레슨을 해주게 된다. 브림의 정식데뷔는 세고비아를 만난 해인 1947년 영국 첼튼햄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14세였던 브림은 1948년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기타리스트로서의 피아노와 기타 작곡을 공부했으나, 당시 기타는 천대 받고 있는 악기였기에 그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가 영국에서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마치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타에 대한 편견이 대단했고, 기타를 클래식음악 범주에 넣기조차 꺼려했다. 심지어는 그가 다니는 학교에도 기타를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브림이 처음으로 학교 안으로 기타를 들고 들어간 것은 학장이었던 게오르그 디슨의 생일 파티 때 기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였다고 한다. 브림은 영국 사람들의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꿔 놓은 장본인이다.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한 그는 1951년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며 불과 3년 안에 영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떠오른 것이다. 군복무 기간에도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던 1954년 첫 유럽 순회 공연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주가가 막 올라갈 즈음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의 아파트에서는 연일 술 마시고 떠드는 파티가 열렸으며, 런던의 젊은 음악가들이 그의 집에 모여들었다. 또한 브림은 프람로드에 있는 핀치라는 카페에서 매일밤 살다시피 했으며, 화가인 빌 톰슨의 아내인 마가렛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69년에 결혼하기까지 했는데, 결국 2년 만에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브림은 그 때를 '대단한(거친) 시기'라고 회고한다. 그의 40년 기타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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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음악에 대해 고민했고, 담배연기 자욱한 카페 한 귀퉁이에서 여자와 술로 젊음을 허송했다. 그가 찾아낸 돌파구는 현대음악과 전원 생활이었다. 과거 월셔의 섬머 스쿨에 참여한 적이 있던 그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숲을 항상 동경하고 있었다. 그는 60년대 초 런던을 떠나 월셔로 이사를 했다. 우아한 18세기 양식의 브로트 옥크에 정착한 것이다. (브림은 지금도 그 집에서 동료인 준과 함께 살고 있다. )  


  그는 그때부터 바로크에서 낭만에 이르는 수많은 클래식 곡들을 기타곡으로 편곡·연주했고, 벤자민 브리튼·월튼·헨체·쇤베르크 등의 현대음악까지도 기타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연주가로서 황금기를 맞은 그는 줄리언 브림 콘서트를 결성하고 기타합주 활동을 벌이는 한편,테너 피터 피어스와 같이 협연무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수십 곡에 달하는 기타 독주곡과 협주곡의 세계 초연도 대부분 이때에 이루어졌다.

 

  그의 레코딩 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RCA와 손잡고 40년 가까이 발매한 숫자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는 그동안 미국 국립 레코딩 과학아카데미상을 6회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에디슨상 2회, 수차례의 그라모폰상, 빌라 로보스 금상, CBE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동료인 존 윌리엄tm와 함께 출반한 음반은 여러 장에 걸쳐 골든 디스크를 기록했다.  


  브림의 명성은 1976년 영국 BBC방송이 '전원생활'이란 프로그램으로 그의 일대기를 방영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그는 예후디 메뉴인·BBC방송교향악단과의 협연을 통해 기타를 협주악기로 부각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브림은 낭만파 음악이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세고비아 스타일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레퍼토리에 스페인 기타음악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스페인 음악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기타라'라는 8개로 된 비디오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그는 이 프로그램에 스페인 기타음악의 대부분을 포함시켰다. 특히 류트 외에는 손대지 않았던 브림은 이 시리즈에서 르네상스기타·스페인 비우엘라·바로크 기타·얇은 몸체의 현대 기타에 이르는 다양한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브림은 지난 91년 위그모어 홀에서 자신의 연주생활 40주년 기념음악회를 가졌다. 1951년 첫 런던 데뷔 연주에서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장소에서 가진 그날 공연은 영국 기타계에 많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영국의 기타 전문지인 팡파레지는 그날의 연주를 "그의 음색은 강하면서도 공명이 풍부하고, 인토네이션과 조화도 완벽했다. 그의 신화적인 음색과 테크닉에 누구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쓰고 있다. 브림은 40년 동안인연을 맺어왔던 RCA와의 계약을 끝내고 지난 90년에 EMI로 소속을 옮겼다. 그것은 40년간의 연주활동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

 

  이미 EMI를 통해 몇 장의 디스크를 출반하기도 한 브림은 재기와 함께 몇몇 중요한 일들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해 BBC와 함께 4회에 걸친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고, 8개의 스페인 기타 및 류트 음악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르네상스 류트음악에 기타 테크닉을 접목시킨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10여 년간 멀리했던 류트에 다시 손대기 시작했다. 매년 여름 월셔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류트와 하프시코드 워크샵과 즉석 페스티벌이 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포츠카 광이었던 브림은 84년 여름 무개차를 타고 티스버그에서 옥크가에 있는 그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오른팔을 차창에 기대는 습관이 있던 그는 그날도 차창에 팔을 피대고 시속 100킬로가 넘는 속도로 다리 아래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는 급 커브길에서 그만 핸들을 돌릴 틈도 없이 앞에 있는 석조 건물을 들이받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 응급실에서였다. 팔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그에게 정밀검사가 시작됐다. 가장 걱정했던 두뇌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오른팔의 몇 군데가 조각나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의사들의 "브림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브림은 그때 목숨을 부지했다는 안도감보다는 기타리스트로의 생명이 끝났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고 한다. 당시 51살이었던 그는 세고비아가 고령으로 서서히 무대에서 사라짐에 따라 가장 확실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바로 1년 전인 83년에 그라모폰 지는 50살 생일을 맞은 그를 표지 인물로 선정할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브림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수술을 받기 직전 의사가 전신마취와 국부마취, 어느 택하겠느냐는 주문에 그는 선뜻 국부마취 쪽을 택했다. 그것은 기타리스트로서의 그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다음은 의사와 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브림의 오른 팔은 보통 팔이 아니었다. 40여 년 동안 기타와 함께 살아온 그를 전후 영국 음악계의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은 그런 팔이기 때문이다. 브림은 1년 만에 위그모어 흘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과거 정열적이던 그의 모습은 아니었다. 냉철하리만치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그는 사고 후 점차 기타와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기타계에서 모습을 감추자 자연 존 윌리엄스가 기타계의 거장으로 등장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친구들에 의하면 브림은 몇 년에 걸쳐 기타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미 그는 5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기타계에서는 공공연하게 그의 은퇴설이 나돌았다.

 

  그럴 때쯤 아시아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월리엄 월튼이 브림의 재기를 돕기 위해 몇 개의 소곡을 작곡해 브림에게 연주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브림은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기로 했다며 이를 거절했다. 과거 같으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브림이었다. 월튼은 브림을 그 지역의 이발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 이발사는 손님들에게 아주 형편없는 기타 솜씨로 세레나데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본 브림은 다시 기타를 잡게 되고, 몇 년간에 걸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그는 기타 외에 류트에 대한 접근을 다시 시도하고, 기타에 관한 저술을 하기도 했다. 89년 엘리스 털리 흘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교통사고 이후 가장 확실한 재기 무대였다. 그는 음악의 모멘텀을 잃지 않으면서도 핑거링의 섬세함과 기악적 밸런스가 살아 숨쉬는 뛰어난 개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기타 리뷰지는 그날의 공연을 '올해의 가장 영감 넘치는 연주'라고 평가했고, 그 후 그는 "작곡된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발견해내는 연주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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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림의 음악에 대한 자세는 매우 진지하고 정열적이다. 그는 학생들을 레슨할 때 항상 정열과 즐거움이 넘쳐 있다.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그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으로 멜로디를 불고,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방안을 왔다 갔다 한다고 한다. 어떤 때는 학생의 연주에 즉흥적으로 반주를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제자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관한 한 매우 까다롭고 엄격한 편이다. 음악적인 바탕이 없는 연주나, 작곡자가 지시한 기호를 잘 지키지 않는 연주를 상당히 싫어한다. 여기서 그가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리듬과 템포 루바토이며, 같은 프레이즈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고비아를 중심으로 한 개성강한 스타일의 연주나 낭만파 분위기의 연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세고비아의 공적을 인정하고, 그의 음악세계를 대단히 좋아하긴 하나 그의 연주 스타일은 현대 연주가들이 추구하는 세계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기타음악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연습과정을 살펴보면 금세 이해가 간다. 그가 어느 한 곡을 자신의 레퍼토리로 만들기 위해서 보이는 열의는 대단한 것이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는 처음에 악보만 가지고 음악의 개요를 파악하고 그 곡에 사용된 몇 가지의 작곡 기법을 이해한다. 그런 다음 한동안 생각한 후에 기타를 가지고 연습에 들어가는데, 그 연습기간은 최소한 1개월은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곡이 그의 레퍼토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5~6주간 그 곡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며, 그 다음 작은 연주회에서 연주를 시도해 보고 서서히 본격적인 연주회나 녹음에 들어간다. 그 후 2~3년간에 걸쳐 몇 번이고 연주하다가 그 이후에 그 곡을 계속해서 연주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내린다.  


  브림은 또한 많은 기타 곡을 편곡해서 연주하고 있다. 그는 편곡에서도 원래의 곡의 성격을 최대한 살리면서 기타에 맞게 편곡하고 있는데, 그 고심한 흔적은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된다. 그가 한 곡을 편곡하는 데는 최소한 1주일 정도 걸리며, 어느 한 곡을 자신의 레퍼토리로 만들 때와 같이 매우 신중한 편이다. 처음 편곡한 곡을 4개월 정도 검토하고 난 후에 자신이 직접 연주하여 녹음해 보고 다시 원보와 대조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독자적인 기타의 생생한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곡은 그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때로는 그를 보면 대가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소심한 구석도 발견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편곡한 곡을 갖고 그 곡의 작곡가를 찾아 가서 조언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행위에 관한 한 자존심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줄리언 브림의 기타 음색은 세고비아니 존 월리엄스 등의 빛나는 듯 한 투명한 음과 비교하면 대단히 변화하는 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음 하나하나는 살짝 그을린 은처럼 수수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낭만파 음색도, 현대적인 음색도 아닌, 브림의 독특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음악으로 나타날 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브림은 어떻게 보면 기타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테크닉에 있어서의 그의 손가락은 남다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탄현할 때 줄과 45도 각도가 되는데, 그는 그 주법을 톱 스트로크(Top Stroke)라 부른다. 이 톱 스트로크 주법은 현재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주법 중의 하나이다.

 

  브림은 기타연주에 있어 "가슴으로 느낀 것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그의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기타 연주가 청중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연주가의 생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것을 기타라는 악기가 갖고 있는 기술적인 한계라고 탓한다면 그것은 기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연주가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을 잘 듣고, 매우 빠른 스피드를 요하는 부분에서는 정확하면서도 자신 있게 연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도 테크닉도 자신이 엄격하게 콘트롤할 수 있는 연주를 할 수 있을 때 청중은 비로소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인지 연주홀에서의 그의 자세는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편이다.

 

  연주홀에 따라, 또는 청중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음향이 다르므로 우선 리허설 때 철저하게 점검하고 본 연주 때는 무대 위에서 작은 소리로 조현하면서 음향을 점검하는 철저를 기한다. 그러나 때로는 음향이 좋지 않은 홀에서 연주할 때도 있다. 그럴 경우 그의 연주태도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는 그런 흘에서는 음향을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몰두한다. 그렇게 하면 청중들도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 음악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연주가 없는 날에는 집에서 정원 손질도 하고 집 근처 구릉 지대를 산보하기도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있을 연주를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 휴식은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